3키워드 습작

고양이, 거리, 단발

"이 고양이, 알고 있어?"
그런 소리를 들었다. 나유가 보여주는 사진은 새하얀 고양이 사진이었다. 집에서 정성을 쏟아서 기르는지 정리가 잘 되어있는 털과 신기한 오드아이를 가진 고양이. 굳이 말하자면 엄청 '비싸보였다'.
"이봐요, 나유씨. 거리 한복판에서 고양이 사진을 보여줘도 난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고."
나는 고양이 털에 알레르기가 있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만지지 못해 안달난 어딘가의 세계관의 누군가와는 또 다르다. 굳이 내 몸에 해로운 녀석을 좋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나유라고 부르는건 좀 그만두면 안될까?"
나유의 이름은 나유진. 앞머리를 핀으로 고정시킨 단발머리 소녀. 유진이라고 불러도 좋고, 나유진이라고 이름을 모두 불러도 관계없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부르고 싶어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 정도로 적당한 설정이다.
"싫은데."
나유를 '나유'라는 별명으로 부른 시간이 벌써 3년. 설마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유는 내가 부르는 방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새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것도 매번 있는 일이다. 어쩐지 3년동안 반응이 늘 한결같다.
"그럼 나도 똑같이 부를거야."
"그렇게 해."
물론 나는 그렇게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름은 외자이기 때문에 성을 포함해봐야 겨우 두 글자이기 때문이다.
성은 류씨요, 이름은 시.
엄마가 일본인인 탓에 이렇게 지어졌다. 어떻게 불러도 일본 이름같은 느낌이라 누가 뭐라고 부르던지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어릴 때는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학교때부터 점점 마음에 드는 특별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 또 특이하다.
"두 글자로 줄여도 내 이름은 원래 두 글자니까."
"칫."
나유는 3년 전부터 늘 같은 반응을 한다. 마치 이런 장난은 항상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 처럼. 장난을 모르는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 처럼 나에게 한결같은 반응을 보여준다.
"나유. 오늘 우리집에서 밥 먹고 갈래?"
오늘은 부모님 모두 출장이시라 아무도 없는 날이다. 하필이면 해외 출장이라 앞으로 1주일은 더 안계실 예정이기도 하고. 거기다 안타깝게도 나는 혼자서 밥을 차려먹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나유에게 은근슬쩍 빌붙을 생각을 했다.
"응? 오늘 류시네 부모님 안 계셔?"
"오늘부터 1주일동안 해외 출장이셔서."
"1주일이면 그냥 내가 같이 1주일동안 있는 편이 낫지 않아?"
'나유! 이 어찌나 천사같은 아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1주일동안 우리집에서 밥해달라는 말을 대놓고 꺼내기엔 약간 부담스런 감이 있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유에게 신세를 지기로 결정했다.
"그럼, 좀 부탁할게."
"일단 집에 가서 짐을 좀 챙겨서 가야겠네. 같이 갈래?"
나유네 집에 가면 언제나 그쪽 부모님들이 나를 환영해주지만, 나는 그 집에 가기 꺼려진다. 솔직히 그 고양이가 넘치는 골목길만 아니면 괜찮은데, 어쩐지 나유네 주변에 널린 고양이로 인해 그 길가 근처만 가도 온몸이 가려워지는 기분이 들어 꺼려진다.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을 정도다.
"아니, 나는 먼저 집에 가있을게."
"아, 고양이."
나유는 내 팔에 잔뜩 돋은 닭살을 보고 내 기분을 파악했는지, 금방 챙겨가겠다는 말만 하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으아아아..."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집에 도착했다. 나유는 톡을 확인해보니 30분은 지나야 온다고 했으니 일단 도착하기 전에 먼저 정리를 좀 해야겠다.
"그보다, 내 방은 뭐가 이렇게 많지."
매번 청소를 할 때마다 생각하는 일이지만 방에 쌓인 저 쓰레기의 산이 뭔지 참 궁금하다. 딱히 방에서 뭘 먹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고, 쓰레기를 만들 일을 만들지 않는 주의인데, 문득 청소를 하려고 보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 산을 확인하게 된다.
"이건 나유가 안본다고 넘겼던 책이고, 이건 안듣는다고 넘긴 CD고, 이건 뭐지?"
쓰레기 산이 거의 다 사라졌을 무렵, 나는 엄청나게 먼지가 가득한 인형을 발견했다.
"일단 털어보자."
인형을 창밖에 놓고 열심히 털어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먼지가 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 지경이 되려면 3년은 제자리에서 먼지를 먹어야 할 정도인데...
"아!"
아무래도 저 인형은 3년 전에 나유가 생일선물이라고 주었던 고양이 인형인 것 같다. '인 것 같'은 이유는 아무래도 기억의 애매함때문이다. 나유가 준 기억은 있는데, 고양이 인형이었는지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있다가 나유한테 물어봐야지."
나유는 기억력이 좋은데다가 자기가 준 물건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고양이 인형을 빨려고 하는 데까지는 좋았지만, 아직 다른 빨래가 돌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열심히 고민을 하고 있으니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어차피 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유밖에 없지만.
"유진이야."
"그런 사람 몰라요."
인터폰 너머로 들리는 나유의 목소리는 알고 있지만 어쩐지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나유진이야."
"누구더라?"
그리고 인터폰 화면 너머로 보이는 나유의 얼굴이 점점 무섭게 변해갔다. 조금 더 장난치면 아마 오늘은 주걱으로 귓방망이를 날릴 지도 모른다.
"그럼 오늘 저녁은 없는 걸로."
정말로 삐졌는지, 나유는 빠르게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녁의 위기감을 느낀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유를 붙잡았다.
"정말로죄송합니다나유씨제가잘못했어요한번만봐주세여"
"..."
"어이구, 이렇게 무거운 걸. 얼른 저한테 주시고, 편히 들어가세요."

"..."
집으로 들어왔지만 나유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문제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고.
"저기... 나유...?"
"..."
"정말로 잘못했으니, 한 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훗."
무릎꿇고 두손모아 싹싹 빌기까지 해서야 나유가 조금 웃었다. 그리고 아직 열심히 비는 중이던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류시는 오늘 저녁 굶어도 할 말 없는 거지?"
나유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그 웃음에선 농도 짙은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그것만은..."
저녁을 굶어도 좋겠냐는 나유의 제안은 굶주린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버리기엔 충분한 조건이었다. 일단 한끼만 굶어도 쓰러지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리고 작은 기분변화에도 조절이 풀려버리는 내 눈물샘은 공복에 자극되어 닭똥같은 눈물을 내었다.
"어, 어?? 류시? 울어?"
"응."
"알았어, 밥 제대로 해줄테니까. 걱정하지 마. 누가보면 며칠 굶은 사람한테 먹방보여준 줄 알겠네."

역시 나유가 해주는 밥은 최고다. 가능하다면 나한테 시집오면 좋을 정도로. 물론 성별의 한계상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만. 그보다 아까 먼지를 신나게 털었던 인형쪽이 더 신경쓰인다.
"저기, 나유. 혹시 3년 전에 나한테 준 인형말이야."
"아, 그거? 왜?"
"고양이 인형이 맞지?"
제발 맞아라... 아니면 또 나유가 화낼지도 몰라!
"응. 그때는 류시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 준건데."
다행이도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 그건 왜?"
"아까 방 정리하다가 나와서. 혹시 기억이 애매해서 착각했나 싶어서 말이지. 히히."
"어차피 방 한구석에서 3년동안 먼지먹다가 발견되서 지금쯤 먼지털고 세탁기 위에서 대기중이겠지."
"어떻게 알았어!?"
"내가 3년동안 이 집에 몇 번을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거의 두 달에 한번씩은 1주일씩 살고 가는데."
생각해보면 나유가 우리집에 오는 일은 꽤 많았다. 부모님이 출장가면 내가 나유를 찾기 때문이다. 나유 의존증을 해결해야 하나.
"그럼 3년동안 내 인형 방치를 보고서 아무런 말도 안했다는 뜻이잖아!"
"응. 언제쯤 알아채나 궁금해서 놔뒀는데."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있지만 나유의 눈이 전혀 웃고있지 않았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지만 눈은 만년설마냥 시리다. 아까보다 화가 더 많이 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죄송합니다나유씨제가잘못했어요한번만봐주세여"
"미안해야지. 그럼. 우리 류시는 나에게 미안해야하고말고."
그 뒤로는 아까 있었던 일의 반복이었다. 나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아까와 다른 점은 나유가 내 머리를 잡고 빙빙돌리며 괴롭히는 점 뿐이었다.

"어지러~."
그렇게 10분정도를 나유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아직 어지러워 균형잡기 힘든 몸을 애써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다 빠져 일어날 수 없었다.
"류시~ 많이 힘들어?"
"금방 먹은 저녁 메뉴를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야."
"내가 불러줄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류시, 나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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